용사님은 마왕님을 사랑해 (1화)
미캉 26-06-22 20:15 11
“누나는 어디에서 왔어요? 왠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네! 귀도 길쭉하고 엄청 예쁘니까…. 음, 천사 맞죠?”

그녀는 아직 어린 코비의 머리를 쓰다듬곤 고개를 돌려 희미한 불빛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것을 어린 코비도 발견하곤 환하게 웃는다.

“자,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볼 수 있는 거죠?”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어차피 너는 이 일을 잊을 거고 난 그걸 개의치 않을 테니.”

어린 코비를 두고 뒤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잠깐만요!”

코비는 쫓아가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헉”

잠에서 깨어난 코비가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기억이 흐릿한 어릴 때 어두운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의 일을 꿈으로 가끔 꾼다. 자신을 구해줬던 그녀를 찾고 싶었지만, 꿈에서도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옅게 한숨을 쉬던 코비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올해 성인이 되며 기사가 된 코비는 어제 포드 국왕에게서 받은 명령서를 펼쳤다. 명령서의 제목은 『마왕에게 납치된 루미나스 왕녀 구출 명령』이다.
어딘가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 머리가 지끈거려 코비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지만 이것은 동화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 여태껏 왕은 여러 명의 기사를 보냈지만, 다들 왕녀의 모습조차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기가 마계로 가는 입구.”

우주 빛 가스가 원심으로부터 스멀스멀 퍼져오는 불길하고도 신기한 기운이 코비를 맞이했다. 코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이윽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두려웠지만, 코비에겐 그럴 시간도 사치였다.

“...”

마계. 마족들이 사는 곳. 몽마, 뱀파이어, 오크, 드래곤 등이 살고 있는 미지의 세계. 마기라는 어두운 마나가 가득하여 마나가 없는 인간은 접근조차 불허하는 그곳.

“어, 또 인간이다.”
“그러게.”
“요즘 자주 오네.”

코비의 인기척에 사람들. 아니 마족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기사인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투 자세를 취하려던 찰나였다.

“마왕님을 만나러 온 거야, 인간?”
“에?”
“하하, 너도 그렇구나. 그럼, 저기로 가.”
“네?”

예상외로 호전적이지 않은 마족의 모습에, 혼란에 빠진 코비의 눈에 세 개의 달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검은 성 비쳤다.

“도착하면 가운데 가장 큰 성이 있어. 거기로 가면 돼.”

상상과는 다르게 친절한 마족. 그동안 교육받은 것과 너무나도 다른 현실에 코비는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마족은 손으로 턱을 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맨몸의 인간이 가기엔 좀 먼가?”

마족은 코비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튕겼다.

“실례.”
“지, 지금 뭐 하시는!”
“뭐긴. 데려다줬지?”
“!”

고개를 올려다보니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장소.
순간이동 마법이었다. 파란 달, 노란 달, 붉은 달이 고딕풍의 큰 성 위에 안정적으로 걸려있었다. 코비는 인간계와 사뭇 다른 어둡고 차분한 느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가 마왕님 성이야. 대문 안쪽은 마법이 안 되어서 여기까지밖에 못 데려다주네.”

“그, 그게. 어, 감사합니다?”
“푸하하. 내가 인간한테 감사하다는 얘기를 들을 줄이야!”
“그, 그런가요.”
“어서 올라가 봐.”

코비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들 데려다준 건 맞으니,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성의 대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끼익

코비가 다가가자 저절로 열리는 대문과 저 멀리 보이는 마왕 성.

“저기까지 언제 가지.”

코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래도 납치당한 왕녀님은 무서우시겠지. 잡생각 말자.”

그렇게 발을 한 발짝 뗀 순간. 어딘가로 급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멀미가 돌았다.

“으윽.”

극도의 어지러움에 코비는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도리질을 한 코비의 앞에는 웬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코비를 보곤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

허벅지까지 오는 주황빛 머리. 한쪽 눈을 가린 탓일까,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작게 미소 짓는 그녀의 눈은 에메랄드빛이었다.
누군가를 외모로 평가하는 건 분명 실례였지만 그런 이성을 잠시 놓을 만큼,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왠지 익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코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름다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마왕이 루미나스 왕녀 말고도 다른 사람까지 감금한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코비였지만 화낼 수는 없었다. 눈앞의 여인은 그저 납치당한 또 다른 희생자일 뿐이니.
눈앞의 여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코비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녹안을 가진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는 기사 코비라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시죠? 설마 마왕에게 납치당한 분입니까?”
“...”
“저는 납치된 왕녀님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납치당한 사람이 한 분이 아니라니. 괜찮으시다면, 아니 꼭…!”

코비의 횡설수설한 말을 듣던 그녀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다시 커졌다. 그 모습에 묘한 무게감이 느껴져 코비는 말을 멈췄다.

“마왕은 당신 같은 것보다 강해. 여기 왔던 다른 사람들처럼 분명 그냥 돌아가고 말 거야.”

코비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힘에 억압되어 그저 갇혀있을 뿐인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래도. 저는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수련을 거쳐 왔고.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은 만큼 돌려주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두렵다고 여기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

코비의 말에 대답하지 않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검지로 커다란 문을 가리켰다.

“루미나스는 저 방에 있어.”

루미나스. 왕녀의 이름이었다.

“감사합니다! 당신도 같이”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마족이 여인의 옆으로 와 허리를 숙여 예의를 차렸다.

“총 집사 론셰. 마왕님의 부름을 명받고 왔습니다.”

총 집사라는 자의 말을 듣자마자, 아까 마족들을 마주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충격이 코비의 머리를 퍽 치고 지나갔다. 눈앞의 여성은 마족의 상징인 뿔이 없어 당연히 마족이 아닌 인간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

지금 보니 그녀의 귀가 엘프처럼 길쭉하다는 것 정도.

“정말 마왕이라고요? 당신이?”

코비의 물음에 마왕은 아까까지 내뿜지 않았던 마기를 내뿜어 단숨에 성 전체를 감싸 안았다.

“...!”

그녀는 마왕이 분명했다. 엄청난 마기와 확실한 위압감.
목숨을, 아니 시신을 보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잠시. 코비는 허리에 찬 검을 뽑곤 온몸에 투명한 다이아몬드 빛 오러를 갑옷처럼 두르고 마왕을 향해 검을 겨눴다.

“방금, 분명히 보여줬을 텐데. 당신은 나를 이길 수 없어.”

코비는 다짐하듯 검 자루를 쥔 손은 가다듬어 더 힘주어 잡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단숨에 방금 마왕이 가리킨 문 앞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문 안쪽에 있을 왕녀가 혹시라도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가.”

론셰는 마왕이 저 기사에게 흥미가 있는 것을 눈치채곤 가볍게 묵례하고 사라졌다. 코비를 향해 몸을 돌린 마왕의 두 녹안에선 보석 같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 자명했다.







“이런 격차라니.”

결투는 처참했다. 코비의 오러를 훨씬 웃도는 그녀의 마기에 갑옷이 전부 부서지는 것은 물론이고,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짐작건대 뼈도 여러 군데 부러진 것 같다. 결정적으로 기사 코비의 검에도 금이 가 두 동강 나기 일보 직전이다. 그에 비해 마왕의 용태는 전투 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등 뒤의 문을 힐끗거리던 코비의 눈에 문득 실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자신은 분명 최선을 다해 오러를 이용한 검기를 날렸는데도 이렇게까지 방 안이 깨끗할 리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코비는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마왕이 방 안을 보호하며 자신과 대적한 것을.

“하….”

보통의 간격이 아니었다. 자신은 참격 하나하나가 모든 오러를 쏟아낸 것임에도 마왕은 생채기 하나 없이 건재하니까. 난 이제 죽는 걸까. 어떤 선택을 하던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으니, 여한은 없었다. 코비가 눈을 감은 순간.

“딱히 죽일 생각은 없어. 다른 인간들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는데, 너는 다르군. 어디든 내키는 대로 다녀라.”
“...그게 무슨?

마왕의 말에 코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무표정인데 왠지 자신을 바라보는 녹안이 상냥한 빛을 띠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기엔 이미 코비는 여기까지 오는 데 마족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

마왕은 잠시 코비를 바라보더니 손짓으로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갑옷과 무기들을 복구시키곤 그곳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째서.”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코비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 당신은 코비 기사 아니신가요?”
“와, 왕녀님…?”

한눈에 봐도 포드국에서 왕족들이 주로 입는 것과 비교해도 손색없은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한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금발이 찬란한 루미나스 왕녀가 확실했다.

“왠지 잘 지내고 계신 것 같네요.”
“기사님이 보기에도 그래요?”

루미나스는 드레스 끝자락이 살랑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왕궁에서 스치듯 봤던 그녀의 어두웠던 얼굴과 대조되어 더 빛나 보였다. 코비는 그녀를 행해 예를 갖췄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루미나스가 코비를 이끈 곳은 마왕의 정원. 각기 다른 계절에 피는 꽃들이 일제히 피어있는,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곳이었다. 분명 이곳은 성안. 실내임에도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해와 구름, 그리고 기분 좋은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
“저 나무, 마계의 벚꽃이래요. 기사님이 봐도 예쁘죠?”

정원 가운데에는 흰색의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코비가 그 옆에 있던 나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루미나스가 가이드를 하듯이 소개했다. 이 정원에서 마왕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렇군요.”

진줏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벚나무에 코비는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왜 이럴까, 처음 보는 나무인데.

“일단 앉을까요? 아마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데!”
“네, 왕녀님.”

코비는 루미나스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살짝 빼주곤 맞은 편에 가서 앉았다. 벚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니 평온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사실 제가 마왕님한테 부탁했어요. 저를 데려가 달라고.”
“...네?!”
“다른 왕녀들이 그랬듯이 저도, 언젠간 영식 중의 누군가와 결혼하게 되면. 아마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할 거예요.”

코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사실 마법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제 입으로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못 하지도 않고!”

그건 코비도 동의하는 바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의 마력은 웬만한 왕궁 마법사와 견줄 수 있을 만큼은 되었으니.

“근데 마왕하고는 어떻게 알고 지내셨던 건가요?”
“아, 그게…. 사실은 마왕님 우리 중간계 여기저기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도 어릴 때 왕궁에서 우연히 만났고요.”
“네? 왕궁이요? 그곳은….”
“맞아요. 언제나 강력한 실드로 보호받고 있는 곳이죠. 근데 마왕님에게는 그렇게 소용이 없나 봐요.”

“겪어 보셔서 아시잖아요”라는 미소와 함께 왕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살아온 17년 중에 지금이 제일 행복해요. 포드국에는 없는 서적들도 많고요. 마족들도 친절하구, 또 부탁하면 마왕님이 직접 마법도 알려주니까!”

그렇게 말하는 루미나스는 한점의 거짓도 없이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건 의심조차 할 수 없는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걸 알았으니, 기사 코비는 그녀를 데리고 갈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기사가 되기로 했던 그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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